이럴때 이맛집

마라톤

업종 글쓴이 여기부산
주소 부산 부산진구 부전2동 519-13 전화번호 --
등록일 11-11-30 평점/조회수 2 / 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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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라톤 하나,‥‥넥타이 한 병!"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53년 된 서면의 술집 '마라톤'의 오랜 단골이라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마라톤'은 굴·홍합·모시조개 등의 해산물과 채소에 계란을 풀어 철판에 부쳐낸 해물부침개다. 1959년 지금의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자리에 있던 옛 부산상고(현 개성고) 담벼락 옆에서 천막을 치고 장사를 시작하던 때부터 생겨난 음식이다. 유래도 없고 원형도 없던 음식이기에 마땅한 이름 또한 없었다. 그냥 '해물찌짐'이었다. 구수한 기름 냄새가 발길을 붙잡았고, 넉넉한 해산물과 계란의 조합이 애주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입소문이 퍼져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나라 잃은 민족의 애환을 안고 달렸던 손기정 선생의 마라톤은 곧 '빠름'의 상징이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던 누군가가 천막 안을 향해 "마라톤 합시다!"라고 외쳤다.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경제개발을 향해 달려야 했던 시민들에게 이 외침은 재촉이기도 했거니와 서로를 향한 격려이기도 했다. '마라톤'은 순식간에 퍼졌다. 노련한 주인장은 손님의 외침에 부응했다. '해물찌짐'에 '마라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몇 년 후 천막 생활을 접고 번듯한 가게로 옮기면서 상호까지 '마라톤'으로 달았다.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쌀로 빚은 청주가 대세였다. 전북 군산에서 생산된 백화수복은 고급 청주의 대명사로 주류 판매량 1위였다. 때로는 품귀현상이 벌어져 술집마다 사재기가 성행하기도 했다. 군소업체에서 생산되는 청주는 일반 청주로 대접 받았으며 가격 또한 1.5배 정도 차이가 났다. 1.8L 됫병으로 출시되다 보니 술집에서는 이를 나눠 팔아야 했다. 따뜻하게 데운 청주가 인기였지만 마땅한 술병이 없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단단한 콜라병만이 중탕을 해도 깨지지 않았다. 청주를 콜라병에 나눠 담고 데워서 팔았다. 백화수복과 일반 청주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백화수복이 담긴 콜라병에는 붉은색 전선을 목에 감았다. 단골들은 이를 두고 '넥타이'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마라톤 하나, 넥타이 한 병!"은 해물찌짐 한 접시에 백화수복 한 병을 의미 했다. 이를 두고 마라톤의 40년 단골인 권경업 시인은 "애주가의 풍류와 주인장의 파격이 만난 절묘한 조합"이라며 "역사라는 것이 쓰자고 해서 쓰여지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하루하루 쌓여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역사다"라고 말한다.

철도공무원이었던 민병현(1922~1989) 씨와 아내 김원희(79) 씨는 1951년 1·4후퇴 즈음해 황해도 해주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갑작스러운 피난이라 일가친척들에게 기별도 못한 채, 양복 한 벌과 한복 한 벌, 가재도구 몇 가지만을 꾸렸다. 철도공무원이라 다른 사람에 비해 편하게 내려왔다고는 해도 해주에서 서울을 거쳐 부산까지 오는 데 한 달이 걸렸다. 한 달여를 움막집에서 거주하다 당감동에 있던 피난민수용소로 거처를 옮겼다. 남편 민 씨는 미군부대에서 막노동을 했지만 사고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젊은 부부는 장사를 시작한다. 양복을 팔아 밑천을 마련해 수박장사를 시작으로 과일장사, 과자장사, 얼음장사 등등을 했다. 세금 폭탄을 맞고, 외상값을 떼이고, 도둑을 맞는 등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빚만 쌓인 부부는 1959년 옛 부산상고 옆 담벼락에 천막을 치고 음식장사를 시작한다. 밑천도, 기술도, 경험도 없으니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었다. 자갈치시장에서 꼬시래기(망둥이)를 사와 막회를 썰어 팔았다. 땅을 파서 장독을 묻은 다음 막걸리를 붓고 얼음을 띄웠다. 얼음막걸리의 시초인 셈이다. 그럭저럭 여름 한 철은 났지만 가을·겨울 장사가 문제였다. 단골 한 분이 '해물찌짐'을 한번 해 보라 권했다. 자갈치시장을 매일같이 드나들던 민 씨는 해산물을 사와 계란을 풀어 번철에 구워봤다. 기름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쇼트닝'을 사용했다. 가난한 서민들은 그 기름지고 구수한 향에 회가 동했다.

덕분에 1963년 부부는 생전 처음으로 집 한 칸을 마련하고 장사와 살림집을 겸한다. 지금의 '마라톤'이 있는 바로 그 자리다. 번듯한 가게가 생기자 메뉴를 좀 늘릴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 '오뎅'을 한번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명월관이라는 유명 요정 출신의 요리사가 '오뎅' 비법을 전수해 준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삶은 육수에 어묵·쇠심줄(스지)·토란·무 등을 넣었다. '마라톤'에 이어 '오뎅'까지 대박 행진을 이어간다. 차를 몰고 온 손님들은 자리가 없자 차 안에서까지 오뎅 그릇을 비우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정부는 반공과 근대화를 표방하며 범국민적인 '재건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의지는 재건복, 재건체조, 재건담배 등 일상적인 생활용품의 상표에 까지 투영되었다. 각종 해산물과 채소를 이용한 '해물야채볶음'에 손님들은 '마라톤'에 이어 '재건'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이렇게 해서 '마라톤·오뎅·재건'이라는 3대 술안주의 50년 역사가 시작 되었다. 손님과 술집이 함께 엮어 낸 멋진 스토리이다. 그 세월을 함께해 온 김원희 할머니는 "사람이 인심을 잃지 않으면 어떻게든 살 수는 있나 봐"라며 담담히 말한다. 그 흔한 교훈이 주는 울림이 예사롭지 않다.

갑자기 53년 된 '마라톤'이라는 음식의 과거와 현재가 궁금했다. 무엇보다 그 당시에 계란을 지금처럼 넉넉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모든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던 김원희 할머니는 '마라톤'에 대해서만큼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라톤' 한 조각을 드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맛이 같아. 그때 한 장이 80원이었는데 3원 하던 계란 두 개가 들어갔어"였다. 지금은 '마라톤' 한 장이 1만 3천 원이다. "옛날에 조개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씹다 보면 진주처럼 생긴 게 제법 나왔어. 그땐 그게 뭔지 몰랐지. 지금 생각해 보니 진주였던 것 같아." 쉽게 믿기진 않지만, 왠지 믿고 싶은 이야기다. 지금도 마라톤에서는 삼천포에서 조개류 등의 해산물이 들어오는 날이면, 모든 종업원과 가족이 하루 종일 난리법석을 떨어야 한다.

1953년의 '마라톤'과 2011년의 '마라톤'은 딱 한 가지가 다르다. 과거에는 미군부대에서 사용했던 기름을 재활용한 쇼트닝을 사용했으나 지금은 식물성 기름을 사용한다. 동물성·식물성 기름이 뒤범벅이 된 쇼트닝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했다. 마라톤의 오랜 단골들은 "냄새 하나만큼은 죽여줬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지금 그런 기름을 쓴다면 당장 문을 닫아야겠지만, 그땐 그랬다.

1971년 '하꼬방'이라 부르던 판잣집을 2층 양옥으로 신축했다. 이를 기념해 어느 단골 손님은 '마락돈(馬樂豚)'이라는 가차 이름과 현판을 만들어 줬고, 이는 한동안 마라톤의 상호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온통 유흥가로 변했지만, 주변에 음식점은커녕 술집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자동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마라톤 손님일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창업주인 민병현 씨는 1989년에 작고했다. 낯가림이 심해 처음 장사를 시작하고 10년 동안 설거지만 했다는 김 할머니는 민병현 씨가 작고한 후에는 십수 년을 홀로 마라톤을 지켰다. 필자가 마라톤의 문턱을 넘기 시작하던 시기도 그 즈음이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할머니의 미모(!)는 여전하다. 2004년에 큰아들 민성기(60) 씨와 조광희(56) 씨 부부에게 바통을 이어줬다.

마라톤을 이어받은 며느리 조광희 씨는 몇 년쯤 지나 건물 인테리어를 새롭게 바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손님들이 추억을 찾아 오는 장소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탁자 하나조차 바꾸지 못하겠더라"며 기름때 진득한 마라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며느리는 서울서, 미국서, 일본서 수십 년 만에 찾아 오는 손님들을 볼 때마다 "시어머님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생겨난다"고 말한다. 그런 며느리를 두고 시어머니는 "고맙고, 자랑할 만한 며느리"라며 치켜세운다.

사람들은 미래를 지향하지만 과거를 추억하며 산다. 마라톤의 맛이 변함 없다지만 고객들의 입맛이 변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지금, 50년 전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음식이 그때처럼 맛있을 턱은 없다. 하지만 '마라톤·오뎅·재건'에는 50년 세월을 관통하는 추억이 녹아있기에, 세대를 막론하고 애주가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수십 년 단골들의 의리와 고부간의 애틋한 정이 깔려있다.

존재 자체로 고마운 것들이 있다. '부산의 노포' 시리즈 네 번째로 소개했던 급행장과 마라톤은 1950년대 서면에서 시작됐다는 사실 외에도 공통점 하나가 더 있다. '급행'과 '마라톤'이라는 단어에서는 특유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고 마셔야 했지만 느긋하게 즐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전쟁과 혹독한 피난살이의 절망과 불안은, 억척스럽고 끈끈한 삶에 대한 의지와 강한 생활력이라는 부산 사람 특유의 정서를 낳았다. 급행장과 마라톤이라는 이름 속에는 그런 정서가 화석처럼 남아있다. 전쟁과 가난을 극복하고 50년 세월을 버텨 온 노포(老鋪)의 진정한 가치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부산 부산진구 부전2동 519의 13. 051-806-5914

박상현 자유기고가 landy@naver.com
[이 게시물은 여기부산님에 의해 2014-12-11 15:51:13 부산일보 맛집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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